2차 보어전쟁 발발 이틀째인 1899년 10월 12일, 남아프리카의 소도시 마페킹에 보어인 병사 7천명이 들이닥쳤다. 마페킹의 영국 수비대 병력은 7백명. 절대적인 수의 열세였다. 하지만 이듬해 5월 17일까지 무려 217일간의 포위 공격에도 방어망은 뚫리지 않았고, 결국 보어인은 물러났다. 영국군 지휘관 로버트 베이든 파월 대령은 일약 마페킹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런데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끈 요인 중 하나가 소년 척후병의 활용이었다. 병력이 부족했던 파월은 소년들에게 적정을 정찰하고 전령 임무를 수행케 해 예상 외의 성과를 거뒀다.
파월은 소년들에게 규율과 애국심을 가르치고 체계적인 훈련을 시킬 필요성을 느꼈다. 1907년 8월 22명의 소년을 선발해 브라운시섬에서 시험캠프를 열어 단체생활과 야영을 경험하며 가능성을 확인했다. 그리고 1908년 소년을 위한 정찰활동이란 지침서를 펴낸 뒤 11월 16일 보이스카우트연맹을 공식 발족시켰다.
보이스카우트는 창립 직후부터 유럽, 미국, 아시아 등 세계로 급속히 퍼져 갔다. 한국에서는 1922년 10월 조철호가 조선소년군, 정성채가 조선소년척후대란 이름으로 보이스카우트를 창설했다. 조선소년군과 조선소년척후대는 1924년 통합했으나 1937년 일제에 의해 해산되었다가 해방 후 1946년 대한보이스카우트로 재출범했다. 보이스카우트 세계사무국은 1920년에 설립됐고 그해에 세계잼버리대회가 처음 열렸다.
소년병에서 유래한 보이스카우트는 군사적인 요소가 배어 있다. 스카우트란 명칭도 척후·정찰을 뜻한다. 그래서 초기 조직과 훈련은 군대식이었다. 이를 두고 보이스카우트가 군사주의·집단주의 정서를 주입하는 역할을 했다는 비판도 있다. 정광용 기자 kyjeong@
△필리핀 연방공화국 성립(1935.11.15)
△태국 타놈 총리 친위쿠데타(1971.11.17)
△한국형 해군경비함 첫 진수(1982.11.18)
△북한, 남북연방제 제안(1960.11.19)
△독립문 준공(1897.11.20)
△동독-서독 통상협정 체결(1957.11.21)